
왼손잡이, 독학, 악보 문맹 - 역사상 최고
기타를 배우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는 시작이 너무 늦었다, 손가락이 짧다, 레슨을 제대로 못 받았다. 주변을 보면 나보다 빨리 느는 사람이 꼭 있고, 그럴 때마다 괜히 나의 조건을 한 번쯤 돌아보게 되곤 합니다.
오늘은 한 사람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습니다. 기타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그 이름 지미 헨드릭스입니다.
그렇지만 오늘은 그가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이야기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가 얼마나 불리한 조건에서 시작했는지 말해보려 합니다.

첫 기타는 5달러짜리 중고 기타
헨드릭스는 1942년 시애틀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은 가난했고, 어린 시절 내내 헌 옷을 입고 구멍 난 신발을 신고 다녔습니다. 아버지는 돈을 아끼려고 직접 그의 머리를 잘라줬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난이라는 상황을떠나 헨드릭스의 음악에 대한 관심은 어릴 때부터 끊이지 않았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 척 베리, 머디 워터스. 그는 음반에서 흘러나오는 기타 소리에 완전히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지인이 집에 기타를 들고 왔습니다. 어린 헨드릭스는 그 기타를 손에 쥐고 한참을 만졌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지인은 그 기타를 5달러에 팔겠다고 제안했고, 주변의 설득 끝에 아버지가 그 기타를 사주었다고 합니다.
5달러짜리 낡은 어쿠스틱 기타. 그게 바로 모든 것의 시작이었습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당연히 레슨은 꿈도 꾸지 못했기에, 대신 그는 레코드 플레이어 앞에 앉아 귀로 들으며 혼자 따라 기타를 치곤 했습니다. 음반을 틀고, 멈추고, 다시 틀고, 또 따라 치고. 매일 반복하며 선생님도, 교재도, 악보도 없이 오직 귀 하나로 기타를 익혔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의 시작은 악보를 읽거나 쓸 줄도 모르는 그 출발이었습니다.

왼손잡이
헨드릭스는 왼손잡이였습니다. 지금이야 왼손잡이용 기타가 어렵지 않게 구해지지만, 당시에는 달랐습니다. 왼손잡이용 기타 자체가 드물었고, 있다 해도 가난한 헨드릭스가 살 수 있는 가격이 아니었습니다. 선택지가 없었던 그는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뒤집어서 치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알 헨드릭스가 왼손으로 기타 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그 이유는 왼손으로 뭔가를 하는 건 악마의 짓이라고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당연하게도 미신이지만, 라틴어에서 왼쪽을 뜻하는 단어 "sinister"가 동시에 "불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을 만큼, 왼손잡이에 대한 미신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헨드릭스는 두 가지를 모두 익혀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없을 때는 왼손으로 기타를 치고, 아버지가 있을 때는 오른손으로 기타를 치는 법을 둘 다 연습하게 되었고, 강요된 불편함이었지만 이게 오히려 그를 양손 모두 자유로운 연주자로 만들었습니다.

불리함이 개성이 되다
기타를 뒤집어치면 단순히 방향만 바뀌는 게 아닙니다. 픽업의 위치가 달라지고, 줄의 장력 배분도 바뀝니다. 펜더사의 스트라토캐스터를 뒤집어 치면 브릿지 픽업의 각도가 반대로 기울어지면서 고음 줄이 픽업에 더 가까워지는데, 이게 고음에 독특한 두께감을 만들어냅니다. 헨드릭스 특유의 묵직하고 두터운 톤은 바로 이 뒤집힌 구조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이, 결국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소리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기타리스트들이 그 소리를 따라 하려고 자신의 기타에 왼손잡이용 넥을 달았을 정도였습니다.

무명 시절
무명 시절도 길었습니다. 헨드릭스가 처음부터가 스타였던 건 아닙니다. 군 제대 후 그는 아이슬리 브라더스, 리틀 리처드 같은 뮤지션의 백밴드 기타리스트로 수년을 보냈습니다. 주목받지 못하는 세션맨이었고, 돈도 이름도 없는 기타리스트였습니다.
전환점은 1966년이었습니다. 뉴욕의 작은 클럽에서 연주하던 헨드릭스를 롤링 스톤즈의 키스 리처즈 여자친구 린다 키스가 발견했고, 그녀가 애니멀스의 매니저였던 챠스 챈들러에게 소개했습니다. 챈들러는 헨드릭스를 런던으로 데려갔고,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가 결성되었습니다.
런던에서의 첫 공연 이후 반응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에릭 클랩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이 모두 직접 공연을 보러 왔으며, 에릭 클랩튼은 헨드릭스의 연주를 보고 나서 "기타를 그만 쳐야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질 정도의 파격적인 등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이 알아보다
1967년 6월 18일, 캘리포니아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 이 날은 헨드릭스의 진정한 시작과도 같은 날입니다.
당시 헨드릭스는 미국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기타리스트였습니다. 런던에서는 이미 이름을 알리고 있었지만, 고향 미국에선 여전히 무명이었으며, 그런 그가 몬터레이 무대에 섰습니다.
공연은 시작부터 범상치 않았습니다. 독창적인 피드백과 디스토션, 블루스와 록을 뒤섞은 연주, 그리고 폭발적인 무대 장악력. 에릭 클랩튼을 제치고 며칠 만에 런던 기타 씬을 뒤흔들었던 그 에너지가, 이번엔 미국 전체를 향했습니다. 그리고 공연의 마지막, 헨드릭스는 자신의 기타에 불을 질렀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퍼포먼스가 아닌, 선언이었습니다.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방식이었습니다.
몬터레이 이후 헨드릭스의 커리어는 수직 상승했습니다. 그는 Axis: Bold as Love, Electric Ladyland 같은 앨범으로 전 세계적인 슈퍼스타가 됐고, 와우 페달과 유니바이브 같은 이펙터를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해 기타로 표현할 수 있는 영역 자체를 넓혀버렸습니다. 그리고 2년 뒤, 1969년 우드스탁. 당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출연료를 받는 록 뮤지션으로서 우드스탁의 헤드라이너로 섰습니다. 일정이 밀리고 밀려 새벽이 지나 아침 9시가 되어서야 무대에 올랐지만, 헨드릭스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기타 하나로 미국 국가 "Star-Spangled Banner"를 연주했습니다. 그 연주는 깔끔한 연주가 아닌, 피드백과 디스토션으로 전쟁의 포탄 소리, 로켓 소리를 표현하며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기타로 말했습니다. 그 연주는 1960년대 전체를 상징하는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5달러짜리 중고 기타로 시작한 아이가, 시대 전체를 기타 하나로 말하는 사람이 된 겁니다.

하고싶은 이야기
좋은 기타가 없어서, 레슨을 못 받아서, 늦게 시작해서. 이 말들이 핑계라는 걸 말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진정으로 느끼는 한계이고,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헨드릭스의 이야기 앞에서는 그 한계가 조금 다르게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으며, 돈도, 선생님도, 제대로 된 악기도, 심지어 악보를 읽는 능력조차 없었습니다.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뒤집어서, 귀 하나만 믿고, 레코드 플레이어 앞에서 혼자 연습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가 되었습니다.
조건이 실력을 만드는 게 아닙니다.
그 조건 안에서 무엇을 하느냐가 실력을 만듭니다. 그것이 헨드릭스가 우리에게 전해 준 이야기입니다.

왼손잡이, 독학, 악보 문맹 - 역사상 최고
기타를 배우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는 시작이 너무 늦었다, 손가락이 짧다, 레슨을 제대로 못 받았다. 주변을 보면 나보다 빨리 느는 사람이 꼭 있고, 그럴 때마다 괜히 나의 조건을 한 번쯤 돌아보게 되곤 합니다.
오늘은 한 사람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습니다. 기타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그 이름 지미 헨드릭스입니다.
그렇지만 오늘은 그가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이야기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가 얼마나 불리한 조건에서 시작했는지 말해보려 합니다.
첫 기타는 5달러짜리 중고 기타
헨드릭스는 1942년 시애틀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은 가난했고, 어린 시절 내내 헌 옷을 입고 구멍 난 신발을 신고 다녔습니다. 아버지는 돈을 아끼려고 직접 그의 머리를 잘라줬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난이라는 상황을떠나 헨드릭스의 음악에 대한 관심은 어릴 때부터 끊이지 않았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 척 베리, 머디 워터스. 그는 음반에서 흘러나오는 기타 소리에 완전히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지인이 집에 기타를 들고 왔습니다. 어린 헨드릭스는 그 기타를 손에 쥐고 한참을 만졌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지인은 그 기타를 5달러에 팔겠다고 제안했고, 주변의 설득 끝에 아버지가 그 기타를 사주었다고 합니다.
5달러짜리 낡은 어쿠스틱 기타. 그게 바로 모든 것의 시작이었습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당연히 레슨은 꿈도 꾸지 못했기에, 대신 그는 레코드 플레이어 앞에 앉아 귀로 들으며 혼자 따라 기타를 치곤 했습니다. 음반을 틀고, 멈추고, 다시 틀고, 또 따라 치고. 매일 반복하며 선생님도, 교재도, 악보도 없이 오직 귀 하나로 기타를 익혔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의 시작은 악보를 읽거나 쓸 줄도 모르는 그 출발이었습니다.
왼손잡이
헨드릭스는 왼손잡이였습니다. 지금이야 왼손잡이용 기타가 어렵지 않게 구해지지만, 당시에는 달랐습니다. 왼손잡이용 기타 자체가 드물었고, 있다 해도 가난한 헨드릭스가 살 수 있는 가격이 아니었습니다. 선택지가 없었던 그는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뒤집어서 치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알 헨드릭스가 왼손으로 기타 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그 이유는 왼손으로 뭔가를 하는 건 악마의 짓이라고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당연하게도 미신이지만, 라틴어에서 왼쪽을 뜻하는 단어 "sinister"가 동시에 "불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을 만큼, 왼손잡이에 대한 미신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헨드릭스는 두 가지를 모두 익혀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없을 때는 왼손으로 기타를 치고, 아버지가 있을 때는 오른손으로 기타를 치는 법을 둘 다 연습하게 되었고, 강요된 불편함이었지만 이게 오히려 그를 양손 모두 자유로운 연주자로 만들었습니다.
불리함이 개성이 되다
기타를 뒤집어치면 단순히 방향만 바뀌는 게 아닙니다. 픽업의 위치가 달라지고, 줄의 장력 배분도 바뀝니다. 펜더사의 스트라토캐스터를 뒤집어 치면 브릿지 픽업의 각도가 반대로 기울어지면서 고음 줄이 픽업에 더 가까워지는데, 이게 고음에 독특한 두께감을 만들어냅니다. 헨드릭스 특유의 묵직하고 두터운 톤은 바로 이 뒤집힌 구조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이, 결국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소리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기타리스트들이 그 소리를 따라 하려고 자신의 기타에 왼손잡이용 넥을 달았을 정도였습니다.
무명 시절
무명 시절도 길었습니다. 헨드릭스가 처음부터가 스타였던 건 아닙니다. 군 제대 후 그는 아이슬리 브라더스, 리틀 리처드 같은 뮤지션의 백밴드 기타리스트로 수년을 보냈습니다. 주목받지 못하는 세션맨이었고, 돈도 이름도 없는 기타리스트였습니다.
전환점은 1966년이었습니다. 뉴욕의 작은 클럽에서 연주하던 헨드릭스를 롤링 스톤즈의 키스 리처즈 여자친구 린다 키스가 발견했고, 그녀가 애니멀스의 매니저였던 챠스 챈들러에게 소개했습니다. 챈들러는 헨드릭스를 런던으로 데려갔고,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가 결성되었습니다.
런던에서의 첫 공연 이후 반응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에릭 클랩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이 모두 직접 공연을 보러 왔으며, 에릭 클랩튼은 헨드릭스의 연주를 보고 나서 "기타를 그만 쳐야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질 정도의 파격적인 등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이 알아보다
1967년 6월 18일, 캘리포니아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 이 날은 헨드릭스의 진정한 시작과도 같은 날입니다.
당시 헨드릭스는 미국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기타리스트였습니다. 런던에서는 이미 이름을 알리고 있었지만, 고향 미국에선 여전히 무명이었으며, 그런 그가 몬터레이 무대에 섰습니다.
공연은 시작부터 범상치 않았습니다. 독창적인 피드백과 디스토션, 블루스와 록을 뒤섞은 연주, 그리고 폭발적인 무대 장악력. 에릭 클랩튼을 제치고 며칠 만에 런던 기타 씬을 뒤흔들었던 그 에너지가, 이번엔 미국 전체를 향했습니다. 그리고 공연의 마지막, 헨드릭스는 자신의 기타에 불을 질렀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퍼포먼스가 아닌, 선언이었습니다.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방식이었습니다.
몬터레이 이후 헨드릭스의 커리어는 수직 상승했습니다. 그는 Axis: Bold as Love, Electric Ladyland 같은 앨범으로 전 세계적인 슈퍼스타가 됐고, 와우 페달과 유니바이브 같은 이펙터를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해 기타로 표현할 수 있는 영역 자체를 넓혀버렸습니다. 그리고 2년 뒤, 1969년 우드스탁. 당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출연료를 받는 록 뮤지션으로서 우드스탁의 헤드라이너로 섰습니다. 일정이 밀리고 밀려 새벽이 지나 아침 9시가 되어서야 무대에 올랐지만, 헨드릭스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기타 하나로 미국 국가 "Star-Spangled Banner"를 연주했습니다. 그 연주는 깔끔한 연주가 아닌, 피드백과 디스토션으로 전쟁의 포탄 소리, 로켓 소리를 표현하며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기타로 말했습니다. 그 연주는 1960년대 전체를 상징하는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5달러짜리 중고 기타로 시작한 아이가, 시대 전체를 기타 하나로 말하는 사람이 된 겁니다.
하고싶은 이야기
좋은 기타가 없어서, 레슨을 못 받아서, 늦게 시작해서. 이 말들이 핑계라는 걸 말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진정으로 느끼는 한계이고,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헨드릭스의 이야기 앞에서는 그 한계가 조금 다르게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으며, 돈도, 선생님도, 제대로 된 악기도, 심지어 악보를 읽는 능력조차 없었습니다.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뒤집어서, 귀 하나만 믿고, 레코드 플레이어 앞에서 혼자 연습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가 되었습니다.
조건이 실력을 만드는 게 아닙니다.
그 조건 안에서 무엇을 하느냐가 실력을 만듭니다. 그것이 헨드릭스가 우리에게 전해 준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