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타, 나아가 음악을 시작하고 싶은데 망설이고 있으시다면, 이 이야기를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 경기도 화성의 한 시골 마을에서 자란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비틀즈의 음악을 듣고 가슴이 뛰었고, 롤링스톤즈의 음악에 전율했으며, 벤처스의 기타 사운드에 완젼히 매료되었습니다.
꿈이 있었다면 딱 하나, 기타리스트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시대는 그 꿈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그 꿈을 완강히 반대하였습니다. 음악인이란 '딴따라'라 불리며 무시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소년의 아버지는 1901년생이었습니다. 아들이 음악을 좋아한다는 사실조차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온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꿈을 가지고 있던 소년.
그 소년이 바로 조용필입니다.
목차
- 기타 하나 들고 무작정 집을 나서다
- 기타리스트에서 가수로, 우연이 만든 운명
- 7년의 무명, 그리고 한국 음악사의 전설
- 멈추지 않는 사람, 가왕의 기록들
- 57년이 지난 지금도 현역인 이유
- 그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
- 총평

기타 하나 들고 무작정 집을 나서다
1968년 2월, 바람이 차갑던 어느 날.
열어덟 살의 조용필은 아버지와 심하게 갈등을 겪은 끝에 기타 하나를 달랑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왜소한 체구에 앳된 얼굴. 더하여 변변찮은 기타 실력.
가진 것이라고는 음악을 향한 열정뿐이었던 청년은 경기도 파주, 문산 일대의 미군 기지촌을 떠돌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미8군 무대는 한국 대중음악의 모든 것이 시작되던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연주 한 번 하려고 이 악단 저 악단 기웃거렸지만, 돌아오는 건 구박뿐이었습니다.
쫓겨나고, 또 쫓겨났지만 그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조용필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처음에 나는 그저 취미로 음악을 좋아했을 뿐이다. 그런데 못하게 말리는 바람에 삶이 그렇게 흘러온 것 같다."
못하게 말릴수록 더 깊이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기타리스트에서 가수로, 우연이 만든 운명
미8군 무대를 전전하던 조용필은 컨트리 웨스턴 그룹 '애트킨즈'에 합류하며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파이브핑거스'를 결성해 미8군 무대에 올랐고, 1971년에는 3인조 록 그룹 '김트리오'를 결성하며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밴드의 보컬이 갑자기 입대하게 됩니다. 마이크를 잡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자리를 채운 건 기타리스트였던 조용필이었습니다.
그렇게 우연히 마이크를 잡은 그 순간이, 대한민국 가요사를 바꾸는 출발점이 됩니다.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합니다.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었던 소년이, 기타를 치다가 우연히 노래를 부르게 되었고, 그 목소리로 가왕이 되었으니까요.

7년의 무명, 그리고 한국 음악사의 전설
집을 나선 것이 1968년이었고,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처음 이름이 알려진 것이 1975년이었습니다.
7년이었습니다.
그 7년 동안 조용필은 밤무대를 전전했습니다.
인기 가수가 지각하거나 펑크 내면 대신 올라가서 시간을 메우는 '땜빵 가수'로 일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몰랐습니다.
그러다 1977년에는 대마초 파동에 휘말려 또 한 번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경험을 합니다.
활동 금지, 침묵의 시간.
그때 그가 쌓아온 악보와 자료들을 모조리 불살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만큼 절망이 깊었다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그는 다시 일어섰습니다.
1979년 그룹 '위대한 탄생'을 결성하고, 1980년 정규 1집 '창밖에 여자'를 발표합니다.
이 앨범은 대한민국 최초로 100만 장 이상 판매된 밀리언 셀러가 됩니다.
이후 내놓는 앨범마다 연이어 히트하며 1980년대 최고의 가수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기타 하나 들고 쫓겨났던 열어덟 살 청년이, 한국 대중음악의 모든 세대를 관통한 가왕이 된 것입니다.

멈추지 않는 사람, 가왕의 기록들
재기에 성공한 조용필은 그 후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당대 최고의 음악 순위 프로그램이었던 KBS '가요톱10'에서는 한 노래가 5주 이상 1위를 하지 못하도록 골든컵 제도를 만들어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1994년에는 국내 누적 음반 총판매량 최초 1,000만 장 돌파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숫자가 아닙니다.
조용필은 단순히 히트곡이 많은 가수가 아니었습니다.
트로트와 록, 발라드와 팝, 민요까지.
어느 한 장르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을 탐구했습니다.
판소리와 락의 접목, 오페라와 락의 접목, 그의 앨범 하나하나가 그 시대 한국 대중음악의 경계를 넓히는 실험이었습니다.
음악 평론가들은 조용필을 두고 "한국의 현대 대중음악사 그 자체"라고 표현합니다.
과장이 아닙니다.
그가 음악을 하기 전과 후로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풍경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57년이 지난 지금도 현역인 이유
2025년 9월, 고척스카이돔.
1만 8,000석 규모의 공연 티켓이 두 번의 티켓팅 모두 5만 명의 대기인원 속에서 3분 만에 전석 매진되었습니다.
폭우가 쏟아지는 악천후 속에서도 객석 점유율은 97%였습니다.
그날 무대에 선 조용필의 나이는 일흔다섯이었습니다.
KBS는 이 공연을 '광복 80주년 대기획 - 조용필, 이 순간을 영원히'라는 제목으로 방영했고,
전국 기준 시청률 15,7%를 기록하며 지상파, 종편, 케이블 전 채널 중 1위를 차지했습니다.
1997년 이후 28년 만에 선보인 KBS 단독 무대였음에도, 데뷔 시절과 변함없는 음색에 깊이와 연륜까지 더해진 그의 목소리는 세대를 가리지 않고 안방을 울렸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나의 영웅"이라 했고, 가수 아이유는 "전 세대가 사랑하는 유일무이한 가수"라 했습니다.
잔나비의 최정훈은 "누군가 가왕의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겠지만, 조용필은 가왕보다 큰 대왕으로 남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 열어덟 살 소년이 기타 하나 들고 집을 나선 지 57년이 흐른 뒤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
조용필의 이야기가 울림을 주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기타를 잘 치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잘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기타 실력이 변변찮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았고, 7년 동안 무명으로 떠돌면서도 음악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후배 음악인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연습을 통해 모든 걸 성취할 수 있다."
화려한 무대, 수십 년을 이어온 현역, 그 뒤에는 이 단순하고 묵직한 진실이 있었습니다.
기타를 시작하고 싶은데 실력이 없어서 망설이고 있다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가왕도 처음엔 기타 하나 달랑 들고 쫓겨났다는 것을.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오늘의 포스팅. 가왕 조용필의 인생과 음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음악의 깊이, 그의 업적 그 모든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이 시대의 가왕입니다.
그랩더기타는 이 이야기를 통해, 기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드리고 싶은데요.
여러분은 기타를 처음 잡았을 때의 그 손 떨림을 기억하시나요.
잘 칠 수 있을지, 늦은 건 아닌지, 이 길이 맞는 건지.
아마 조용필도 그랬을 겁니다.
기지촌을 떠돌며 쫓겨나던 열어덟 살에도, 대마초 파동으로 모든 걸 잃었던 그날에도, 그는 그 질문들을 안고 살았을 테니까요.
그런데도 기타를 놓지 않았습니다.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 그 단순한 마음 하나가 결국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만들었습니다.
대단한 재능이 먼저가 아니었습니다.
멈추지 않는 마음이 먼저였습니다.
지금 기타를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만으로 이미 시작된 겁니다.
기타,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습니다
조용필이 기타를 잡기 시작했을 때 체계적인 레슨도, 커리큘럼도 없었습니다.
기지촌을 떠돌며 부딪히고 깎이며 스스로 실력을 쌓아야 했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유튜브를 통해 독학도 가능한 세상이고, 나아가 독학 속 막히는 부분들이 있다면 레슨 등을 통해 얼마든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랩더기타는 최선의 방식을 찾아가며 여러분들의 즐거운 기타 생활을 위해 여러 방면에서 노력하고 있는 크리에이터이기에,
여러분들의 기타 생활 속, 궁금하시거나 배워보고 싶은 것들이 있으시다면
어떠한 방법으로든.
저희 아카데미에 방문해주셔도, 유튜브 댓글을 달아주셔도, 이러한 글의 댓글에 남겨주셔도 좋으니 편하게 생각을 남겨주세요.
여러분들의 기타 생활 속 좀 더 빠르고 올바른 방향으로 배울 수 있도록 언제나 돕는 그랩더기타가 되겠습니다.
기타를 향한 마음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기타, 나아가 음악을 시작하고 싶은데 망설이고 있으시다면, 이 이야기를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 경기도 화성의 한 시골 마을에서 자란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비틀즈의 음악을 듣고 가슴이 뛰었고, 롤링스톤즈의 음악에 전율했으며, 벤처스의 기타 사운드에 완젼히 매료되었습니다.
꿈이 있었다면 딱 하나, 기타리스트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시대는 그 꿈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그 꿈을 완강히 반대하였습니다. 음악인이란 '딴따라'라 불리며 무시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소년의 아버지는 1901년생이었습니다. 아들이 음악을 좋아한다는 사실조차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온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꿈을 가지고 있던 소년.
그 소년이 바로 조용필입니다.
목차
- 기타 하나 들고 무작정 집을 나서다
- 기타리스트에서 가수로, 우연이 만든 운명
- 7년의 무명, 그리고 한국 음악사의 전설
- 멈추지 않는 사람, 가왕의 기록들
- 57년이 지난 지금도 현역인 이유
- 그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
- 총평
기타 하나 들고 무작정 집을 나서다
1968년 2월, 바람이 차갑던 어느 날.
열어덟 살의 조용필은 아버지와 심하게 갈등을 겪은 끝에 기타 하나를 달랑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왜소한 체구에 앳된 얼굴. 더하여 변변찮은 기타 실력.
가진 것이라고는 음악을 향한 열정뿐이었던 청년은 경기도 파주, 문산 일대의 미군 기지촌을 떠돌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미8군 무대는 한국 대중음악의 모든 것이 시작되던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연주 한 번 하려고 이 악단 저 악단 기웃거렸지만, 돌아오는 건 구박뿐이었습니다.
쫓겨나고, 또 쫓겨났지만 그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조용필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처음에 나는 그저 취미로 음악을 좋아했을 뿐이다. 그런데 못하게 말리는 바람에 삶이 그렇게 흘러온 것 같다."
못하게 말릴수록 더 깊이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기타리스트에서 가수로, 우연이 만든 운명
미8군 무대를 전전하던 조용필은 컨트리 웨스턴 그룹 '애트킨즈'에 합류하며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파이브핑거스'를 결성해 미8군 무대에 올랐고, 1971년에는 3인조 록 그룹 '김트리오'를 결성하며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밴드의 보컬이 갑자기 입대하게 됩니다. 마이크를 잡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자리를 채운 건 기타리스트였던 조용필이었습니다.
그렇게 우연히 마이크를 잡은 그 순간이, 대한민국 가요사를 바꾸는 출발점이 됩니다.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합니다.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었던 소년이, 기타를 치다가 우연히 노래를 부르게 되었고, 그 목소리로 가왕이 되었으니까요.
7년의 무명, 그리고 한국 음악사의 전설
집을 나선 것이 1968년이었고,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처음 이름이 알려진 것이 1975년이었습니다.
7년이었습니다.
그 7년 동안 조용필은 밤무대를 전전했습니다.
인기 가수가 지각하거나 펑크 내면 대신 올라가서 시간을 메우는 '땜빵 가수'로 일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몰랐습니다.
그러다 1977년에는 대마초 파동에 휘말려 또 한 번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경험을 합니다.
활동 금지, 침묵의 시간.
그때 그가 쌓아온 악보와 자료들을 모조리 불살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만큼 절망이 깊었다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그는 다시 일어섰습니다.
1979년 그룹 '위대한 탄생'을 결성하고, 1980년 정규 1집 '창밖에 여자'를 발표합니다.
이 앨범은 대한민국 최초로 100만 장 이상 판매된 밀리언 셀러가 됩니다.
이후 내놓는 앨범마다 연이어 히트하며 1980년대 최고의 가수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기타 하나 들고 쫓겨났던 열어덟 살 청년이, 한국 대중음악의 모든 세대를 관통한 가왕이 된 것입니다.
멈추지 않는 사람, 가왕의 기록들
재기에 성공한 조용필은 그 후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당대 최고의 음악 순위 프로그램이었던 KBS '가요톱10'에서는 한 노래가 5주 이상 1위를 하지 못하도록 골든컵 제도를 만들어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1994년에는 국내 누적 음반 총판매량 최초 1,000만 장 돌파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숫자가 아닙니다.
조용필은 단순히 히트곡이 많은 가수가 아니었습니다.
트로트와 록, 발라드와 팝, 민요까지.
어느 한 장르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을 탐구했습니다.
판소리와 락의 접목, 오페라와 락의 접목, 그의 앨범 하나하나가 그 시대 한국 대중음악의 경계를 넓히는 실험이었습니다.
음악 평론가들은 조용필을 두고 "한국의 현대 대중음악사 그 자체"라고 표현합니다.
과장이 아닙니다.
그가 음악을 하기 전과 후로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풍경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57년이 지난 지금도 현역인 이유
2025년 9월, 고척스카이돔.
1만 8,000석 규모의 공연 티켓이 두 번의 티켓팅 모두 5만 명의 대기인원 속에서 3분 만에 전석 매진되었습니다.
폭우가 쏟아지는 악천후 속에서도 객석 점유율은 97%였습니다.
그날 무대에 선 조용필의 나이는 일흔다섯이었습니다.
KBS는 이 공연을 '광복 80주년 대기획 - 조용필, 이 순간을 영원히'라는 제목으로 방영했고,
전국 기준 시청률 15,7%를 기록하며 지상파, 종편, 케이블 전 채널 중 1위를 차지했습니다.
1997년 이후 28년 만에 선보인 KBS 단독 무대였음에도, 데뷔 시절과 변함없는 음색에 깊이와 연륜까지 더해진 그의 목소리는 세대를 가리지 않고 안방을 울렸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나의 영웅"이라 했고, 가수 아이유는 "전 세대가 사랑하는 유일무이한 가수"라 했습니다.
잔나비의 최정훈은 "누군가 가왕의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겠지만, 조용필은 가왕보다 큰 대왕으로 남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 열어덟 살 소년이 기타 하나 들고 집을 나선 지 57년이 흐른 뒤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
조용필의 이야기가 울림을 주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기타를 잘 치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잘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기타 실력이 변변찮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았고, 7년 동안 무명으로 떠돌면서도 음악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후배 음악인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연습을 통해 모든 걸 성취할 수 있다."
화려한 무대, 수십 년을 이어온 현역, 그 뒤에는 이 단순하고 묵직한 진실이 있었습니다.
기타를 시작하고 싶은데 실력이 없어서 망설이고 있다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가왕도 처음엔 기타 하나 달랑 들고 쫓겨났다는 것을.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오늘의 포스팅. 가왕 조용필의 인생과 음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음악의 깊이, 그의 업적 그 모든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이 시대의 가왕입니다.
그랩더기타는 이 이야기를 통해, 기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드리고 싶은데요.
여러분은 기타를 처음 잡았을 때의 그 손 떨림을 기억하시나요.
잘 칠 수 있을지, 늦은 건 아닌지, 이 길이 맞는 건지.
아마 조용필도 그랬을 겁니다.
기지촌을 떠돌며 쫓겨나던 열어덟 살에도, 대마초 파동으로 모든 걸 잃었던 그날에도, 그는 그 질문들을 안고 살았을 테니까요.
그런데도 기타를 놓지 않았습니다.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 그 단순한 마음 하나가 결국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만들었습니다.
대단한 재능이 먼저가 아니었습니다.
멈추지 않는 마음이 먼저였습니다.
지금 기타를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만으로 이미 시작된 겁니다.
기타,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습니다
조용필이 기타를 잡기 시작했을 때 체계적인 레슨도, 커리큘럼도 없었습니다.
기지촌을 떠돌며 부딪히고 깎이며 스스로 실력을 쌓아야 했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유튜브를 통해 독학도 가능한 세상이고, 나아가 독학 속 막히는 부분들이 있다면 레슨 등을 통해 얼마든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랩더기타는 최선의 방식을 찾아가며 여러분들의 즐거운 기타 생활을 위해 여러 방면에서 노력하고 있는 크리에이터이기에,
여러분들의 기타 생활 속, 궁금하시거나 배워보고 싶은 것들이 있으시다면
어떠한 방법으로든.
저희 아카데미에 방문해주셔도, 유튜브 댓글을 달아주셔도, 이러한 글의 댓글에 남겨주셔도 좋으니 편하게 생각을 남겨주세요.
여러분들의 기타 생활 속 좀 더 빠르고 올바른 방향으로 배울 수 있도록 언제나 돕는 그랩더기타가 되겠습니다.
기타를 향한 마음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